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마카스 마사히코 (문단 편집) === 만주국 영화산업의 중추 === 1939년 11월 1월, 만주영화협회 2대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만영이라 불리는 만주영화협회의 혁신을 가져왔다. 기존의 만주영화협회는 국무총리 [[장징후이]] 직속의 기관으로 전문적 영화인이 참가하지 못해서 독일, 프랑스의 외국영화 수입을 주로 하고 있었다. 1938년에야 첫 영화를 내놓는 형편이었다. 아마카스는 취임과 함께 <만주영화의 성격과 만영>을 발표하여 영화는 국가의 중요사업이며 소련, 이탈리아, 독일의 예시를 들어 국가가 관여하여 만주국의 영화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마카스의 취임사는 다음과 같았다. >"만영의 사명은 만인에게 보이는 영화를 만다는 것으로 대상은 어디까지나 만인에 두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점에서 만영은 과거에 대실패를 범했습니다. (...) 지금 국가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영화를 통해서 만인대중에게 오락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아마카스는 오카다 소조 등의 기술자를 초빙하여 칼라영화 개발에 나섰으며 1940년 <만영 영화의 임무와 만영>을 발표하여 국제적으로 만주국의 실태를 인식시키고, 국내적으로 건국의 진의를 이해시켜야 하며, 기존 만주 영화관에서 상영하던 민국 영화나 상하이 영화를 대체하기 위한 독자적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만영의 임무를 제시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민중을 교화하기 위한 '계민영화'를 만들 것을 주장했다. >"만영의 계민, 오락영화가 진정한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기 위해서는 건국의 이상이 그러한 영화 속에 혈액과 같이 자연히 침투하여, 순화되어, 솟아져 나오게 되는 것을 요하나, (...) 만주영화에 있어 노출이냐 순화냐 라는 것이 아니더라도 건국의 이상은 반드시 현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카스는 비록 선전용 관제영화에 집중하였으나 만주 영화의 엄청난 발전을 가져와 "아마카스가 곧 만영, 만영이 곧 아마카스이며 아마카스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라고 할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향란]]을 배출한 것도 그의 공이었다. 하지만 영화의 선전에만 집중하여 정작 관객의 눈을 중요시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아마카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영화는 이론이 아닙니다. 상대의 두뇌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상대의 생활상, 생활감정이라는 것의 특징을 잘 보고, 잘 알고 나서가 아니면, 정곡을 벗어난 영화가 되는 것입니다. (...) 정치가 표면이라면, 영화는 내부의 작업입니다. 이 내부의 작업인 영화가, 지나치게 표면에 치우쳐, 끌려 다녀서는, 영화의 사명은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전혀 이상을 향해 달려, 공을 세우기에 초조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때문에 관념만이 부상하고, 내용이 공허한 것으로 되어서는 큰 일입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